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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河, 外一
사인은 자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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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께서는 부디 만수무강하시어 불민한 어미를 뒤따르지 마시옵소서.”


어미가 자식에게 으레 건네는 덕담은 분노를 애써 삭이려는 듯 억제된 목소리로 내뱉어졌다. 찻잔을 내려놓듯이 사발을 어떠한 소음도 내지 않고 바닥에 내려놓으며 태연을 가장하나, 주청선은 그런 모습에 티끌만한 관심도 두지 않은 채 핏발 선 눈을 마주하며 그 너머의 두려움을 본다. 겁을 먹은 자는 견디지 못하고 이내 시선을 피해버린다.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흘린 주청선이 잔에 술을 따르며 비아냥거린다.


“본디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가는 것은 불효라고 배웠나이다. 어머니께서는 소자를 불효자로 만드시렵니까?”

“...입 닥치거라, 주청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약을 담았던 사발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쨍- 맑게 부서지는 소리와 주청선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함께 울린다. 주청선은 크게 움직이지도 않고 고개를 두어번 움직이는 것으로 선황이 던지는 물건을 죄 피해버렸다. 이어서 제 목을 노리고 들이밀어지는 칼을 들고 있던 술병으로 막는다. 원평제 주성월은 방랑무사로 이름 높았던 무명의 검객에게 특별히 사사받은 무예실력을 지녔으나, 연마하지 않은 칼은 녹이 슬고 무뎌지기 마련이다. 상대가 주청선이 아니었더라면 다른 결과를 맞이할 수 있었을 테지만, 죽음을 코 앞에 두고 만약을 가장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소자, 폐하를 위해 이 목을 내놓아야 효를 행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오래 전 스승께서 가르치시기를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은 불효라 하였으니 어머니의 칼을 가로막은 것을 용서하여주시옵소서.”

“네이놈! 쿨럭, 컥, …가증스러운 혓바닥을 잘라버리겠노라!”


어미가 내뱉는 증오 섞인 협박이 우스갯소리라도 되는 듯 주청선은 환히 웃으며 칼을 밀어냈다.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자와 막는 자의 합이 짧게 이어지다 끊긴다. 칼날을 그대로 붙잡은 주청선은 잡은 채로 휘둘러 어머니를 넘어뜨리고 칼을 빼앗았다. 그 일련의 동작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듯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러웠다.


당연하다. 주청선이 누구인가? 길거리의 관상가는 그의 얼굴을 보며 살수의 상을 타고났으니 평생 날붙이를 멀리하여야 업을 짊어지지 않으리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주청선은 이미 13세에 전장에 보내져 피와 날붙이를 좌우에 두었다. 15세에 올린 첫 승전보를 시작으로 약관의 나이에 전장의 학살자로 불렸다. 타고난 재능에 전쟁터에서 배운 무기를 다루는 감각과 판단력이 더해지니 이 드넓은 중원에서 주청선을 이길 자가 없었다.


“약효가 돌기 전까지 시간이 있을 터이니 소자와 담소라도 나누시지요.”


빼앗은 칼을 휘휘 둘러보던 주청선은 이내 칼을 두동강으로 부러뜨리고 저 밖으로 던졌다. 바닥에 비참하게 고꾸라진 어머니를 안아들어 초라한 침상에 눕히듯이 앉히니 약효가 금세 퍼진 듯 주성월은 파리한 안색으로 거칠게 기침했다. 호응해줄 상대가 없으니 주청선의 말은 허공으로 흩어진다. 방금 전 소소한 난리로 꺼내놓은 잔과 술병은 깨져서 그 조각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주청선은 이 상황을 예견한 듯 품에서 새 술과 잔을 꺼내 침상 위에 놓고 술을 따른다.


이 얼마나 이치에 어긋난 광경인가. 이는 선황과 황제의 모습이 아니다. 평범한 부모와 자식이 술을 나누는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 아들에게 폐위당하여 다시금 복위하고자 정변을 일으킨 반역자와 어머니를 강제로 냉궁에 연금하다시피 쫓아내 황위를 찬탈한 반역자가 마주보고 앉았다. 두 명의 반역자가 존재할 수는 없기에 기필코 다른 하나는 죄인이 되고, 남은 자가 승자가 된다. 주청선은 명백히도 후자였다.


“많이 힘드시다면 소자에게 말씀해주시지요. 불행히도 소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불효자였으므로, 여기서 더 불효를 저지른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 …네가 나의 부군을, 네 아버지를 죽였느냐?”


주성월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 질문을 내뱉는다. 원평제의 부군이자 주청선의 아버지는 병을 핑계로 사가로 내려가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기던 이였다. 병약하다는 세간의 소문과는 달리 건강이 크게 나쁘지 않았다.


“진작에 눈치챈 사실을 구태여 묻는 것은 낭비가 아닐런지요. 어머니께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사옵니다.”


사발을 내던지고, 칼을 휘두르는 까닭에 약효가 더 빨리 번진 듯 일각 전과는 달리 주성월은 화조차 내지 못하고 핏발 선 눈으로 주청선을 노려보았다. 이제와서야 질문하는 이유는 범인이 생각하기에 아무런 이득 없는 짓이며 단순히 살인을 즐기기 위한 행동이었다기엔 주청선의 행적은 철저하게 그 사건과 무관한 것처럼 꾸며져 있었다.


“네가, 정녕 인간이더냐, 컥.”

“그리 화내시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주청선은 오래 전 그날을 떠올리지 않는다. 기억나지도 않는 순간이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황궁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전쟁에 나가기 전의 태도를 떠올리며 지냈다. 돌아왔다는 것은 떠나기 전의 모습이 된다는 뜻 아닌가? 그러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한 번 ‘맛’을 깨달은 자는 그것을 모르던 때로 가지 못한다. 수단을 달리하여 방법을 조금 변형시켜보는 차원에서 시도한 그 사건은 모두 주청선이 의도한대로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그것은 살육보다는 인형놀이 같았다고. 아비와 어미의 탕약에 독을 탄 주제에 혀가 길었다. 그는 이미 불효를 넘어 패륜을 저질렀다.


“...도대체… 어찌하여 이렇게 된 것이냐 주하야. 나의 아수야…”

“글쎄요.”

“어린 시절의 너는… 그저 장난기 많고… 혈기 왕성한 아이… 였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려 얼굴을 적신다. 주청선은 그 모습이 재밌는 꼴이라도 되는 듯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태자 청선은 13세의 나이에 스승들과 함께 전쟁터로 향했다. 성군이 되기 위해서는 전쟁의 참상을 보고 백성의 삶을 어루만질 수 있는 마음이 필요했고, 주성월은 제 아들이 성군이 되기를 바랐다. 때마침 국경을 침범한 이웃나라와 꽤나 큰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는 필부의 아내가 아닌 한 나라의 황제였으므로 어린 아들을 황제로 가르쳐야만 했다.


그리하여 주청선이 전장에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살육이었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한들 어린아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주청선은 그 나이에 이미 성인 병사 하나를 상대할 수 있었다. 태자가 온다는 소식이 새어나가 적군의 기습이 들어왔고, 주청선은 그날 처음으로 누군가를 죽였다.


함께 떠났던 스승들은 분명 태자를 살뜰히 가르쳤다. 전쟁터에서도 교육은 중요했고, 제왕학을 비롯하여 유교경전, 역사, 무예훈련, 농경실습에 이어서 누군가를 연민하고 어떤 감정에 공감할 수 있도록 연민과 공감을 가르쳤다. 허나, 마음이란 가르친다고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주청선이 가르친다고 연민을 배울 수 있는 부류의 인간인가?


“어찌하여 이리 되었느냐…”


주성월의 잘못을 배제할 순 없다. 선천적으로 악하게 태어났다고 한들 갈고닦으면 달라질 수 있었을 터이니. 스승은 최선을 다했으나, 주청선이라는 괴물을 만들었으므로 죄를 함께 짊어진다. 주청선 본인은 운명에 저항하지 않았으므로 가장 큰 죄인이다.


“어머니께서 마귀를 낳으신 게지요.”


그러나 인제 와서 잘못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주청선은 패륜아고, 아비에 이어 어미까지 죽이려고 한다. 전장의 학살자가 되어 살육을 일삼은 마귀 주혈랑은 언제나 피가 부족하다.


“... 한 가지만 더 묻겠소. 화 답응 그 애를 사랑하시오, 황상?”

“얼마 전에 귀비가 되었습니다. 물론 어머니께서는 그때 정변을 준비하느라 바쁘셨겠지만…”


화 답응, 화 미인, 화 귀비, 화령란. 비단길을 통해 많은 이득을 취한 상인 출신 관료 화씨의 독녀로 태어나, 선황과 화씨의 거래에 따라 13살에 황태자비 내정자로서 입궁하여 온갖 패악을 부린 여자. 둘 다 어려서 혼례는 후일로 미루어졌으나, 화령란은 자신이 황태자비인 것마냥 권세를 휘두르고 황태자의 후궁들에게 패악을 부렸다. 선황의 어리석은 욕심 때문에 황태자비를 약속한 여인들이 많았음에도 령란은 독보적이었다. 주청선이 그에게 답응의 지위를 내릴 때조차 그러했다.


“나는… 황상이 그 애를 사랑했으면 좋겠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주청선은 나지막히 웃으며 술잔을 제 입에 기울인다. 죽음을 앞둔 원평제 주성월이 혼미한 정신으로 망상에 빠진 것 아니겠는가.


주청선은 화령란을 가장 지독하게 괴롭혔다. 후궁들은 끊임없이 때가 되면 높아지는 품계를 보며 화령란이 수를 쓴 것이라 수군댔으나, 선황은 주청선의 변덕에 불과함을 안다. 온갖 금은보화를 안겨주고, 화령란만을 위한 궁을 지어준 뒤에 궐의 가장 높은 처마에 앉아 화령란의 처소로 향하는 암살자의 수를 헤아리는 것이 그의 취미이니 이는 쥐의 집에 고양이를 풀어놓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지독하게 몹쓸 인간이다.


“유언이십니까?”

“유언이라니… 내 그대에게 남길 것은 저주밖에 없소. 죽지도 살지도 않은 몸으로 억겁의 세월을… 부디 령란을 사랑하시오… 부디… 사랑하여 파멸하시오. 그대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멸망하고도 멸망하지 못해 스스로의 목을 쳐도 죽지 못해 살아가거라 주하. 이것은 내가 죽기 전 남기는 저주다!”


지금이 아니라도 좋다. 언젠가는 그 애를 사랑하여 주청선이 저지른 것들이 업보로 돌아와 그의 목을 조르기를. 약하디 약한 인간 하나가 그의 목숨을 쥐고 뒤흔들기를… 언젠가 화령란이 명이 다해 죽을 때 홀로 죽지 못해 어떠한 평화도 얻지 않기를. 거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한 주성월은 단 한 번의 끊김도 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고 그 간절한 마음을 담아 주청선을 노려봤다. 곧 죽을 자가 악을 담아 말하노니, 이 정도 소망은 들어줄 법도 하지 않겠는가? 주청선은 그 마음이 눈에 훤히 보여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니께서도 가담항설을 좋아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소자가 불민한 탓이겠지요. 그러니 마지막은 효를 다하고자 합니다.”


마지막 한 모금을 입에 털어넣은 주청선은 칼을 꺼내들었다. 방금 전에도 누군가의 명을 앗아간 듯 핏자국이 채 마르지 못해 흘렀다. 주성월은 고요히 눈을 감는다. 할말은 모두 내뱉었고,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새벽, 선황의 부고가 알려졌다.

 

사인은 자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