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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鈴蘭, 外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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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당장 가서 사오거라!”

어린 궁녀가 안절부절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상궁이 령란의 심부름을 끝내고 다가왔다. 이래서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것만. 새로 배치된 궁인이 어리바리하여 령란의 화만 돋우는 까닭에 어쩔 수 없이 어린 궁녀를 화빈 곁에 두고 떠난 것이 죄라면 죄였다. 령란은 필시 방금 전 저잣거리에서 관심을 끌었던 물건이 별안간 생각나서 사오라고 어깃장을 두는 게 분명했다. 허나 어린 궁녀 하나와 상궁 하나만 대동하고 나왔으니, 아랫것이 웃전만 혼자 두고 가는 것은 법도에 어긋났다. 그림자 호위무사 수십명이 숨어있다고 해도, 이 사실은 화빈이 모르는 것이므로 웃전이 모르는 것을 감히 아랫것이 아는 체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마마, 예서 잠시만 기다려주시옵소서.”

“저리 굼뜬 이를 어떻게 쓰라는 게냐.

어린 궁녀에게 물건을 사오라 알리는 사이 령란은 분을 다스리지 못한 목소리로 노여움을 드러냈다. 고작 저잣거리의 장난감 하나 사오는 데 이리 오랜 시간을 지체해야 한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어차피 이 저잣거리에 스무 명도 넘는 호위무사가 배치된 것을 어림짐작으로 깨달은 것이 몇 년인데 저 어린 것은 아무것도 몰랐다. 아마도 자신을 모시면 콩고물이 떨어진다는 사실만을 알고 다른 것은 모르겠지. 새로 들어오는 궁녀 열의 반은 권력자의 수족이 되었다는 사실에 내심 자신만만해 하고, 나머지 반은 죽을 날을 받아놓은 것처럼 파리한 안색으로 온몸을 달달 떨고는 했다. 화귀비가 궁인을 죽여서 내보낸다는 소문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감히 그따위 행태다.

답답함에 발걸음을 옮기면, 저를 따라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린다. 사실, 호위무사의 인기척과 발소리는 그들의 존재를 인지하고도 알 수 없는 것이다만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눈치챈 령란은 신경통처럼 그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한 걸음, 두 걸음. 고작 한 뼘 이동하는 사이에 피로가 쌓여 안색이 창백해졌다. 상궁이 나지막히 부르며 부축해온다.

“송구하옵니다. 좀더 총명한 아이를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사가에서 데려온 이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령란 곁을 지킬 만큼 눈치 빠르고, 일처리가 확실했다. 그러므로 평소의 령란이었다면, 내가 직접 고르겠다고 하거나 만족스러운 미소로 그럼 그래야지 하면서 자신만만해 할 테지만, 령란은 아무말도 없이 삐딱하게 기댄 채로 저잣거리와 하늘을 바라봤다.

령란은 사실 이런 저잣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 것을 넘어 혐오한다. 물론 저잣거리 백성들이 즐겨 읽는다는 책 속에 신분을 숨기고 낭군과 함께 저잣거리를 노니며 풍류와 일상을 즐기는 것은 좋아하지만… 여하튼 지금 이곳에 나온 것은 령란의 의지는 아니었다. 화령란은, 화귀비는 구중궁궐만을 바라며 살아왔다. 그곳에서 가장 높은 곳, 바로 그 옆 자리에 앉기만을 기다렸다. 아비의 바람인지 자신의 바람인지도 모른 채 바라고, 바라고, 또 바라고 살다가 끝내 이 궁궐에 들어왔다. 가장 낮은 품계를 받아 억울하기도 했으나, 상공이 어린 시절처럼 저와 유치한 소꿉장난을 하는 모양이라 여겼다. 그에 답하듯 령란은 답응에 불과했음에도 황후 못지 않은 대우를 받으며 궁중 내명부의 위계질서를 혼란하게 했다. 아니지, 그의 하나뿐인 상공께서.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하겠는가. 령란은 상공과 관련된 생각을 불에 덴 것처럼 끊어냈다.

사람의 욕망은 언제 좌절되는가? 령란은 신부수업을 받으며 들었던 물음을 불현듯 떠올렸다. 아마도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알아버렸기 때문이겠거니 생각한다. 사람의 욕망은, 그 욕망의 전제 조건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며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 순간 무너진다. 건물이, 도로가, 물건이 그리 쉽게 부서진 이유는 기초적인 단계에서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들 하니까. 령란은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을 갖다붙여 제 의견에 근거로 댔다. 잘 알지 못하는 것으로 칭하는 것들을, 언젠가는 배웠던 거 같다. 그러나, 이용하지 못한 지식은 어느 골방 구석에 박혀있어 좀처럼 찾을 수 없다.

“마마님, 주인내외가 덤으로 떡을 주었는데…”

“너나 먹거라. 이만 가자!”

조금 허름한 옷을 걸쳐도 상궁 두어명와 보이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수많은 호위무사가 있다. 저잣거리의 백성들은 이미 령란이 평범한 처자가 아닌 걸 눈치챘다. 화령란은 깊은 산으로 가도 그 자연과 어울리지 못해 숨지 못할 것이다. 물론 숨을 필요 없다. 세상 사람들이 숨으면 숨었지. 화령란은 주혈랑의 하나뿐인 부인이 아니던가? 비와 빈이 몇 명이 더 있다고는 해도 령란을 가장 먼저 들였고, 령란만을 우대했고, 령란만을 찾았으며 령란만을… … 괴롭혔다.

달덩어리를 품은 듯 불룩 튀어나온 옷자락 위에 손을 올린다. 조짐을 보아하니 쌍생아로 추정된다고 했던가. 주혈랑의 첫번째 아이들이 될 것이다. 주청선이 달라지지 않는 한 다음 대 황제이기도 했다. 암살자들이 밤마다 기승이지만, 그만큼 화승상의 호위도 촘촘하고 주혈랑 또한 거들고 있으니 불안과 걱정은 타인의 것이다.

다만, 요즘 들어서는 마음이 이상했다. 궁은 침실이자 앞마당이자 집이거늘. 잠을 이루지 못해 새벽녘까지 산책하다가 기절하듯 잠드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렇게 푹 자고 일어나면 다음날 새로운 상궁과 궁녀 넷이 들어왔다. 사라진 궁인의 숫자와 동일했다. 집에 큰일이 생겨서 급히 궁을 나갔다는 변명 같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아도 이것이 상공의 은애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상공은 장난꾸러기 소년이고, 장군이니 과격한 방법으로 연모하는 이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겠지. 아이참, 우리 상공께서는 참으로 귀엽구나—

“왜 그러시옵니까 마마.”

“… 걷기 싫다. 가마를 가져와라.”

“예, 금방 대령하겠나이다.”

그랬던 시절이 있었는데. 아, 너무나도 까마득해서 전생처럼 느껴진다. 붕대로 감은 왼다리가 시큰거려 가져오지도 않은 가마를 대령하라 패악을 부린다. 물리적으로 금방일 수 없음에도 령란은 빨리 가져오라며 불호령을 냈다. 화령란은 상황과 분위기따위에 눈치 보지 않는다. 하지만 알고 싶지 않아도 강제로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눈을 감아도, 귀를 막아도, 잠을 자다가도 알게 된다. 예컨대, 그의 친애하는 상공이 뒤를 따라온 것처럼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감을.

“인간 가마는 어떠시옵니까 마님?”

그는, 상공은, 주혈랑은, 이 나라의 지존 주청선은 령란이 두려움을 깨달은 이래로 그 반응을 즐기듯이 연모하는 이처럼 굴었다. 예전의 령란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교태를 떨며 냉큼 그의 품에 안겼을 터이나 지금은 무섭다. 겁이 난다. 손이 떨리고, 다리에 힘이 풀릴 거 같아 저를 부축한 상궁의 손을 강하게 쥔다.

“… 어찌 제가 감히 폐하의,”

“폐하라니요. 듣는 귀가 많습니다 마님.”

정작 보는 눈으로 신경 쓰지 않은 듯 고급스러운 원단에, 섬세하게 자수가 놓인 검붉은색 옷을 입고 자잘한 보석으로 장식된 상투관을 틀어놓고는 듣는 귀를 들먹인다. 령란은 저를 보며 웃는 낯에 잠시간 또 마음이 설렜다. 저를 향해 다가와 손을 내밀고, 어깨를 부축하는 손에 속도 없이 마음이 출렁거린다. 그리고 주청선은 화령란의 술렁이는 마음을 읽은 것처럼 태도를 바꿔 그의 마음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부인, 몸이 나날이 가벼워지십니다. 상은 이미 치르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또. 이번에도. 마음이 부드럽게 녹아내릴 때 비수를 꽂는다. 아니지, 이미 꽂힌 것을 흔들어 더 큰 상흔으로 남긴다. 언제 흔들렸냐는 듯이 마음이 가라앉는다. 무의식에 묻힌 기억들이 떠오른다. 호위를 놓아줄 화승상은 없다. 제게 다가와 반드시 아들을 낳으셔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던 아버지는 없다.

“… 놓아주세요. 가마가 곧 올 거예요.”

“가마보다 제가 빠를 겁니다 부인.”

“…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이야기 마세요. 령란은 나의, 부인 아니십니까.”

주청선은 단신으로 한 소대를 와해하게 할만큼 무에 과한 은총을 받은 하늘의 아들이었고, 이는 뭇사람들이 감히 주청선에게 검으로 반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령란은 그의 품에 쓰러지듯이 안길 수밖에 없었다. 답답함에 뛰쳐나온 저잣거리는 궁궐과 다를 바 없어졌다. 이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였고, 주청선은 죽을 때까지 령란을 괴롭힐 듯이 따라다닐 터였다.

그래서 령란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고도 구중궁궐에 갇혀 박제당한 채 살 수밖에 없어서, 이 끔찍히도 싫어하는 저잣거리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령란은 자신이 바란 대로 이 궁궐의, 주청선의 하나뿐인 귀비로 살아야 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