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선은 선황의 처소를 나오면서 칼을 두어번 털었다. 그 행동에 떨어질 핏방울은 이미 다 떨어졌음에도 어린아이같은 마음으로 가벼이 칼을 털다가 이내 검집에 꽂아넣았다. 등불이 훤히 켜진 이 시간에 감히 황제와 동선을 겹치고자 하는 간 큰 자는 없었다. 후궁들조차 야밤에 침소가 아닌 복도에서 황제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때때로 간 큰 이가 감히 시도했다가… 여하튼 주청선은 호위도 물리고, 시종도 달랑 하나만을 달고서 걸음을 옮겼다.
“사인은 자결이니라. 날이 밝는 대로 장례를 준비하도록 하고, 냉궁에는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거라.”
“예, 폐하.”
“그래, 어서 가지 않고 무엇하느냐?”
황제의 고집과 변덕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니 내관은 난처함을 애써 감추고 고개를 숙인다.
“폐하, 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지존이시옵니다. 어찌 황제께서 호위도 시종도 없이 행차하시려는 것인지...”
“가거라.”
“폐하…”
세상천지 어느 황제가 혼자 다니는가. 그러다가 살수라도 들이닥쳐서 죽고 만다면,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에서 아군은 기세가 꺾일 것이고 수많은 적군들이 이 나라를 파멸로 몰고 갈 것이다. 주청선은 거둘 수 없는 업보의 씨앗을 너무나도 많이 뿌리고 살았다.
내관의 마음을 아느지 모르는지 주청선은 그가 떠나기를 바라는 듯 한참을 노려보았다. 황제는 인내심이 그리 길지 못했다. 사람을 가려내는 눈 하나만큼은 정확하여 도움이 되는 인간은 3번까지 참아주었으나 그 이상은 용납하지 못했다. 물러서지 않으면 제 목은 오늘 내로 땅에 떨어질 테지만, 내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꿋꿋하게 그 자리에 서있었다.
“누구냐.”
“...폐하.”
그러한 내관을 살리고자 한 하늘의 의지인듯, 복도에서 화빈이 나타났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한 걸음 물러섰다. 희게 질린 안색의 화빈은 황급히 손을 모아 황제에게 인사한다. 며칠 전 보았을 때와 달리 두려움이 먹구름처럼 드리우고, 희게 질린 안색이었다. 방금 전까지 괜찮았던 손은 점차 떨리고 있었다.
화령란은 본디 이러한 기회로 황제와 마주하면 교태섞인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다소곳한 걸음걸이 다가왔다. 다른 후궁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익히 들어온 내관은 그러한 화빈이 황제 다음으로 무서웠었다. 선황이 내명부를 관리하면서 다른 후궁에게 재물이 조금이라도 더 가면 득달같이 그 후궁의 처소에 방문하여 제 아비가 사막 건너 들여온 비단보다 못하며 황제께서 하사하신 보석보다 못하다고 한껏 비웃었다. 황제와 함께 산책한 후궁에게는 없던 죄도 뒤집어 씌워서 회초리질을 당하게 했다. 황제의 눈에 조금이라도 닿은 여인은 곧바로 쫓아냈다. 선황은 후궁이 없었으므로 내관은 이토록 악독한 이는 생전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젠 안타까울 뿐이다.
“부인, 어찌 그리 떨고 계십니까. 새벽공기가 이리 찬데 망토 하나 걸치지 않고 산책 중이셨습니까?”
황제의 말은 총애하는 이를 대하는 듯이 다정했으나, 떨고 있는 화령란의 손을 잡아채는 행동은 어쩐지 강압적이었다. 화령란의 떨림은 오히려 심해져서 어느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모시는 주인을 추위에 떨도록 둔 이들이 누구인가.”
“... 폐, 폐하. 제가, 깜빡한 것이오니…”
화빈의 시종들을 붉은 눈빛이 한 차례 훑어보다가 령란의 외침에 시선이 돌아간다. 얼마 전의 화령란이었다면 꺄르르 웃는 소리를 내며 황제의 손을 맞잡고 저를 걱정해주시는 거냐고 물었을 터였다.
“홑몸도 아닌데 어찌 그리 스스로에게 박정하십니까? 제 마음이 문들어지는 거 같습니다 부인.”
황제는 자연스럽게 제 망토를 벗어 령란에게 걸쳐주었다. 령란은 잠시 그 다정함에 홀린 듯 희미하게 웃다가 짙게 풍는 피냄새에 다시금 안색이 시퍼렀게 질렸다. 선황과 정변을 일으키는 도움을 주었던 몇몇 후궁을 손수 참하고 돌아오는 동안 한 시도 벗지 않아 원래 붉었는지, 피로 물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피냄새에 지난 날의 공포가 엄습한다.
그날의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고 만 령란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눈물을 흘렸다.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무릎꿇고 빌었으나 주청선은 무시했다. 화령란은 그때까지 자신이 총애받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비록 자신을 답응으로 들이기는 했으나, 어린 시절 장난기 많았던 소년을 기억하는 소녀는 이 또한 장난꾸러기의 애정표현이라 생각했다. 그의 생각이 진실이라고 말하듯 황제는 유독 자신을 더 자주 찾아왔고, 더 희귀하고 더 많은 재물을 하사했다. 제 뱃속의 아이 또한 유일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황후가 될 터이고, 제 아비는 현황제와 다음 황제 2대에 걸쳐 외척으로서 가문을 다질 것이었다. 아니, 그런 것보다도 령란은 황제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다. 주청선은 여자라고는 오로지 화령란에게만 관심을 두지 않았던가?
그 사랑이 모래성처럼 흩어졌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니 사상누각이고 신기루에 불과했을 테지. 어질거리는 이마를 짚다가 발을 삐끗하여 미끄러진다. 황제는 그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보다가 땅에 닿기 직전 령란을 안아들었다.
“...폐하께서는… 저를..”
“말씀하시지요 부인.”
“저를… 어찌 생각하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넘어지기 시작할 때가 아니라 난간에 부딪치기 직전에 저를 구하십니까? 신기루가 사라지나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을 알고야 만다. 주청선은 바로 붙잡을 수 있음에도 위험해지기 직전에 자신을 구했다. 그때도 그랬다. 살수가 끊이지 않는 밤, 주혈랑이 화령란을 지킨 것은 한 번뿐이다. 살수는 언제나 끊이지 않음에도, 온전히 곁을 지킨 적 없다.
“부인은 부인이지요. 어떤 말을 듣고 싶은 겁니까.”
“...폐하. 왜 제 아비를 죽이셨습니까?”
눈물로 흥건해진 얼굴을 닦아내는 손이 퍽 다정하여 또다시 홀릴 것만 같았다. 령란은 한 박자 늦게 질문을 내뱉었다. 주청선은 여전히 온기를 품은 듯한 미소를 그려냈다. 대답을 유예하며 령란을 안아든 채 복도를 걸었다.
누가 보면 사이좋은 부부지간이 이 늦은 밤에 산책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다정하다.